2020. 12. 1
따뜻한 옷과 따뜻한 음식과 따뜻한 집이 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욕심내지 않고 이 겨울을 보낼 것이다.
바짝 말라버렸지만 그래서 더 눈을 닮아 아름다운 들꽃을 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
연못 가장자리에는 이제 막 얼음이 얼기 시작하고 있었다.
여름부터 이곳에 터를 잡았던 오리들이 수초들이 모두 잘려나간 연못 한가운데에서 여전히 헤엄치며 놀고 있었다.
2020. 11. 9
타오르는 불꽃을 닮은 한 그루의 나무가 서 있었다.
저 멀리 하늘에 검은 새 떼가 날아올랐다가 아파트 너머로 사라졌다.
2020. 11. 8
며칠 전 차를 타고 지나가면서 본 은빛 물결, 그 억새의 춤을 보러 갔다.
갈대와 억새의 차이점을 몰랐지만 이제는 알 수 있다.
좀 더 풍성하고 부드러운 잎새를 가진 쪽이 억새다.
바람이 많이 불고 있었다.
사방에서 억새가 바람에 흔들리며 사각사각 소리를 냈다.
추워서 모자를 뒤집어쓰고 있었지만 분명하게 들을 수 있었던 가을의 연주,
그리고 그 연주를 배경 삼아 어딘가에서 작은 새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2020. 10. 21
좋은 날 다 놔두고
가을바람 쌀쌀한 날 당신을 만나러 왔다.
그래서인지 따뜻한 당신의 손길 그립다.
어쩌면 나를 보고 환하게 웃는 당신 만날 수도 있겠다.
종소리 울려 뒤돌아 보았다.
노란 은행나무 잎들이 흩날리고 있었다.
2020. 10. 15
두꺼운 커튼을 친 터라 빛이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어렴풋이 그 뒤에 빛이 비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6시 반, 평소 일어나는 시간에 비하면 이른 시간이었지만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입고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아직 어두운 하늘에 살며시 붉은빛이 번지고 있었다.
부지런한 사람들은 벌써부터 해변가에 나와 서성이고 있었다.
나란히 서서 바다를 바라보는 중년 부부, 혼자 나와 바다를 배경으로 셀카를 찍는 여자..
오른쪽 하늘에서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는지 커다란 구름 뒤 편에서 붉은 빛이 올라오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이끌리듯 그쪽으로 걸어갔다.
한 남자가 모래사장에 우두커니 서서 낚싯대를 바다에 넣고 가만히 있었다.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무엇을 낚는 것일까.
일출에 익숙해진 건지 떠오르는 해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이 미동도 하지 않고 낚싯대 끝만 바라보고 있다.
걸어갈수록 붉은빛은 빠르게 구름 위로 솟고 있었다.
마치 서두르면 닿을 수라도 있을 것처럼 괜히 마음이 급해졌지만 푹푹 파이는 모래 때문에 빨리 걷기가 힘들었다.
드디어 구름 위로 빨갛고 동그란 얼굴이 보였다. 그리고 그 옆으로 조그만 무지개가 함께 떠 있었다.
아름다웠다. 더 이상 어떻게 말할 수 있을지 모른 채 아름답다,라고만 중얼거렸다.
이런 풍경을 볼 수 있는 건 우주로부터 받은 선물이겠지.
다시 호텔로 돌아올 때는 신발을 벗고 모래사장을 걸었다.
아직 햇빛에 데워지지 않은 모래는 차가웠지만 더 깊숙한 곳에서 따뜻함이 전해왔다.
낚시하는 남자는 아직도 그대로 서 있었다.
지나가며 남자의 옆에 있는 플라스틱 통을 들여다보니 아직 아무것도 잡지 못한 건지, 아니면 처음부터 잡을 생각이 없었던 건지 잡동사니만 든 빈 통이었다.
2020. 9. 24
누구일까, 풀숲에 숨어 호루라기 부는 이.
커다란 하얀 구름들이 파란 하늘을 덮고 있다.
2020. 9. 1
바스락 소리에 아래를 보니 마른 낙엽이 바스라져 있었다.
무심한 척 발을 옮겼지만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어 곳곳에 떨어진 낙엽을 밟지 않도록 조심히 걸었다.
그러고 보니 나뭇가지에도 노랗게 바랜 잎들이 부쩍 늘어있었다.
혹시나 하여 핸드폰을 꺼내 날짜를 보았다.
아, 역시 그랬구나. 어느덧 가을이 되었구나.
2020. 8. 24
나는 그에게 조심스럽게 키스하였다.
그는 나를 받아들이는 듯 기분 좋은, 그러나 조금은 어색하고 낯선 그런 표정이었다.
나는 그가 달아올랐음을 느끼고 그에게 키스하기를 멈추고 그의 옆으로 돌아누웠고 그는 나를 살며시 안았다.
그리고 나의 가슴 가까이 그의 손이 다가오고 있을 때 점점 그의 손길이 희미해지다 눈을 뜬 것이다.
이제 막 해가 뜨기 시작했는지 커튼 사이의 빛을 바라보는 동안 가슴은 쉴 새 없이 두근거렸고 이 꿈이 계속되기를 바라며 눈을 감았다.
곧 다시 잠이 들었지만 그 꿈은 이미 지나가 버린 후였다.
카페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다 오늘 꾸었던 꿈을 생각했다.
아마도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녹아내리는 듯한 남자 가수의 목소리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를 뒤에서 안은 그는 내 머리카락의 향기를 맡으며 당신에게서 오이 향기가 나요,라고 말해주었을 것 같다.
그리고 그와 나는 사랑을 나누었겠지.
어딘지 조금은 진해진 듯한 녹색 잎사귀들이 길게 늘어져 흔들리고 있다.
문을 열고 나가면 바람에 흩어지는 오이 향기가 날 것만 같다.
2020. 8. 21
불현듯 여름이 끝나가고 있음을 느꼈다.
어린아이의 손을 닮은 단풍나무 잎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반가움의 인사인지 이른 작별의 인사인지 모르겠지만 분명히 손을 흔들고 있는 듯 보였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코 끝이 찡해왔다.
2020. 8. 16
숲은 두 팔을 벌려 낯선 이의 방문을 허락했다.
숲의 정령들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다가와 하얗게 일렁이며 나를 둘러쌓다.
나무와 돌 위에 가득한 녹색 이끼가 발부터 시작해 손으로 타고 올라왔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녹색 공기가 폐 안으로 스며 들어왔다.
새 한 마리 살고 있지 않는 숲속 어딘가에서 커다란 뱀 한 마리가 침묵하며 내가 떠날 때까지 지켜보고 있었다.
저 멀리 조명이 환하게 펴진 오징어 배가 까만 하늘과 까만 바다의 경계를 가르고 있었다.
밤낚시 중인 사람들의 실루엣과 허공을 가르며 날아가 바닷물 위에 떨어져 둥둥 떠 있는 야광 찌가 온통 까맣기만 한 배경 속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파도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적막 속에서 두 아저씨 곁의 라디오에서 들리는 트로트 가수의 노랫소리만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한 아줌마가 횟감을 낚시 중인지 홀로 앉아 낚싯대를 던지다가 담배를 피워 물고는 나를 바라보았다.
오래전 기억 같은, 꿈속의 한 장면 같은 그런 기분으로 검은 물 위에서 춤을 추는 가로등 불빛을 바라보았다.
2020. 8. 3
우산을 접으니 매미가 울기 시작했다.
저 매미에게 남은 날은 얼마나일까.
한 번이라도 뜨거운 햇빛 아래에서 실컷 울부짖어 보아야 할 텐데.
곧 먹구름이 다시 하늘을 덮더니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하나둘씩 우산을 펼쳤다.
새하얀 비둘기가 눈앞으로 날아올랐다.
회색 구름 아래에서 반짝이는 하얀 날갯짓이 사라질 때까지 고개를 들어 바라보았다.
2020. 8. 1
걷는 내내 김현철의 <비가 와>를 흥얼거렸다.
잠시 비가 멈춘 틈을 타 호수 위에서 잠자리들이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
나는 당신과 함께 걸었어요.
당신은 내 손을 잡고,
나는 당신의 얼굴을 보며 웃었지요.
꿈에 나온 그를 생각했다.
집에 오는 길에는 개구리들이 꽈악 꽈악- 하면서 사이좋게도 노래했다.
2020. 7. 31
텅 빈 공원을 걷고 있자니 누군가를 생각하고 싶어졌다.
그립기 때문에 그리운 것이 아니라
그립고 싶기 때문에 그리워하는
여자의 마음을 바라보았다.
2020. 7. 28
새끼 방아깨비가 거미줄에 다리 하나가 걸려 빠져나오려 애쓰고 있었다. 구해주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 작은 나뭇가지를 찾다가 문득 다큐멘터리를 찍는 사람들은 아무리 새끼 동물에게 정이 들어도 천적에게 공격당해 잡아먹히는 때에는 구해주지 않는다는 것이 생각났다. 잡아먹고 잡아먹히는 것은 자연의 순리일 터, 방아깨비가 거미에게 잡아먹히는 것도 당연한 것이겠지. 그래도 아직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너무 작은 방아깨비다. 조금 더 풀숲에서 폴짝거리며 놀아야 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나의 갈등을 눈치라도 챘는지 거미줄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던 무당거미가 재빨리 거미줄을 타고 올라와 빙글빙글 돌며 순식간에 방아깨비를 거미줄로 덮어 버렸다.
이제는 내가 손을 쓸 수도 없구나! 이 거미 또한 아직 채 다 크지 않은 새끼 거미였다. 그러고 보니 거미줄도 왠지 엉성해 보였다. 어쩌면 생애 처음으로 먹이를 얻기 위해 힘들여 거미줄을 쳐 놓은 것이리라. 이 거미에게도 이 사냥의 순간이 생존을 위한 소중한 것일 텐데 내가 그것을 방해할 수는 없는 것이다,라고 방아깨비를 구해주지 못한 스스로를 위로하며 차마 계속 보지 못하고 눈길을 돌렸을 때, 먹이를 빼앗긴 사마귀 한 마리가 분한 마음을 참지 못하고 앞발을 치켜세우고 거미를 노려보고 있었다.
2020. 7. 27
당분간 계속 비가 내린다고 했다. 햇빛이 좋은 날 산책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햇빛만 기다리며 집에만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 우비와 물에 젖지 않는 샌들을 장만했다. 잠에서 깨니 정말 비가 내리고 있었다.
우비를 입고 샌들을 신고 우산을 챙겨 밖에 나갔다. 비가 오는 날 산책을 하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며칠 전 비가 올 때 우산만 쓰고 나갔다가 옷이 온통 비에 젖어 산책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와야 했었는데 우비에 고여 흘러내리는 빗방울을 보니 이제는 비에 옷이 젖을 일이 없겠지,라며 괜히 우쭐해지기도 했다.
평소에 자주 산책하는 개울가에 갔다. 물이 흐르는 소리, 비에 젖은 흙냄새, 잎사귀에 툭툭 떨어지는 빗방울.. 제법 비 오는 날 산책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달팽이 한 마리가 기어가고 있었다. 국민학생 때 비가 오는 날 학교 마당 청소를 하러 밖에 나가면 잎사귀에 매달려 있는 달팽이들을 잔뜩 볼 수 있었다. 친구들과 경쟁이라도 하듯 달팽이를 잡고는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을 집에 데려가 베란다에 있는 화분에 놔주고는 했었다. 다음날이면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버리고는 했었지. 이런 기억을 떠올리며 오늘 산책길에 달팽이를 잔뜩 만날 거라 기대하며 풀잎 사이를 두리번 거렸지만 생각처럼 달팽이가 보이지는 않았다. 빗방울이 고여 반짝이는 거미줄에서 먹잇감을 기다리고 있는 비에 젖은 무당거미 한 마리 뿐이었다.
우비 안으로 땀이 고였다가 식어서인지 조금씩 한기가 느껴지고 우산을 들고 걷는 것이 슬슬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집으로 돌아갈까 잠시 망설였지만 모처럼 작정하고 나온 비 오는 날의 산책이었다. 호수 공원까지만 조금 더 걸어보기로 했다. 평소에는 멀지 않게 느껴지던 곳인데 한참을 걸어서 간신히 도착한 것 같았다. 빗방울이 수면에 떨어졌다 튀어 오르며 예쁜 모양을 만들고 있었다. 소금쟁이들은 뭐가 그리도 신났는지 잔뜩 떼 지어 헤엄을 치며 놀고 있었다. 나비가 비를 피할 곳을 찾지 못했는지 꽃 위에서 하염없이 날갯짓을 하며 물기를 털어내고 있었고, 호박벌은 비가 오거나 말거나 상관없다는 표정으로 꽃 속으로 파고들었다 나왔다 하며 제 할 일을 하고 있었다. 비 오는 날의 호수 공원은 이런 모습이구나. 그래, 이만하면 됐다. 이만하면 충분하다. 이제 집에 가야지. 춥고 습해서 몸에서 열이 나는 것 같았다. 따뜻한 차 한 잔이 절실해졌다. 가까운 카페에 들려 따뜻한 홍차 라떼 한 잔을 마셨다.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예쁜 새 노랫소리가 들려 나무 위를 올려다보았니 비를 피해 백합나무 잎사귀 아래 모인 박새들이 벌레를 쪼아 먹으며 놀고 있었다.
2020. 7. 24
먹구름 사이로 맑고 파란 하늘이 보였다.
우울했던 마음이 걷히고 있었다.
2020. 7. 21
초록빛 물결이 일렁이는 논 가장자리에서 몸을 숨기고 있던 백로 두 마리가 인기척에 놀라 꾸루루룩-하며 날아올랐다가, 은밀한 순간을 들켜버리기라도 한듯 한 마리는 부끄러워하며 저 멀리 날아가 버리고, 다른 한 마리는 능청스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돌아와 초록빛 사이로 고개만 빼꼼히 내민 채 서성이고 있었다.
저 멀리서 수십 마리는 되어보이는 비둘기 떼가 소리 없이 날아올랐다. 비둘기 떼의 날갯짓으로 하얗게 반짝이는 공중, 그곳에는 사랑을 나눌 상대를 찾는 열기가 한창일 것이다.
더위에 지친 버드나무가 가지를 물에 담그고 졸고 있는 연못에는 길게 자란 수초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검푸른 나비잠자리들이 쌍을 지어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 턱시도와 이브닝드레스를 빼입고 무도회에서 춤을 추기라도 하는 것처럼 우아한 몸짓으로.
한여름 무더위에도 풀죽지 않고 화려하게 피어있는 들꽃 위로 아직 짝을 찾지 못한 듯 예쁜 하얀 나비 한 마리가 홀로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 나비를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무시무시하게 생긴 왕파리매가 태평하게 사랑을 나누며 비행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땡볕을 피해 어디론가 들어가 버렸는지 텅 빈 듯한 공원을 걷다가 우연히 발견한 미물들의 사랑의 순간들을 보며, 이글거리는 햇빛 아래라도 좋으니 숨이 막힐 정도로, 땀에 흠뻑 젖을 정도로 강렬한 그런 사랑을 나누고 싶다, 그렇게 불타오르고 싶다고 생각해 보는 것이었다.
2020. 7. 17
대지를 뜨겁게 달구던 해를 옅은 먹구름이 덮으려 하고 있었다.
저녁이 가까워질 때까지도 안간힘을 쓰던 해는 안 그래도 이제 저물려 하던 참이었다며
순순히 구름에 가려지려다가 불쑥 얼굴을 다시 내밀고는 했다.
산책로 곳곳에 마른 달팽이 껍데기가 뎅그러니 놓여 있었다.
지난 비의 기억이 소용돌이치다 굳어져 화석이 되었다.
곧 다시 비가 쏟아질 것이다.
다시 이곳을 찾을 때면 또 다른 화석들이 놓여 있을 것이다.
먹구름이 해를 다 덮자 습한 바람이 불어왔다.
2020. 7. 6
사방에 풀벌레 소리 가득하다.
짙은 녹색의 소리다.
깡총깡총 여름을 뚫고
어린 방아깨비 두 마리가 지나간다.
2020. 7. 2
저녁 7시. 해는 이제야 하루를 마무리하려는지 슬슬 저물고 있었다. 오후에 서울에 다녀와 피곤했지만 장마 사이, 모처럼 구름을 비집고 나온 햇빛이 반가워 가벼운 산책을 하러 나갔다. 비가 내린 후, 아파트 마당에 그동안 보이지 않던 꽃들이 새로 피어 있었다. 모두 저마다의 특징을 가지고 있고, 누가 제일이라고 할 것도 없이 모두 예뻤다. 꽃 중에 제일이라 하면 대부분 단연코 장미를 뽑을 것이지만 우선 나부터도 그렇고, 사람들 모두가 장미를 가장 아름답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한 주얼리 브랜드의 촬영을 앞두고 미팅을 했다. 작업을 하면서 스스로를 뮤즈로 삼고는 있지만 한 브랜드의 뮤즈가 된다는 것에 대해 부담을 가지고 있었다. 아름다운 모델들과 스스로를 비교하는 마음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럴 때면 나의 신체적 약점을 스스로 의식하게 되었다. 그들은 나의 단점이 아닌, 나만이 지닌 아름다움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스스로를 장미와 비교하는 들꽃과도 같았다. 산책을 하면서 내 눈길을 끌고 가까이 다가가 가만히 들여다보며 너 참 예쁘구나, 라고 말해주고 싶어지는 것들은 이름도 몰랐던 들꽃이었다. 비 온 뒤에 피어난 예쁜 들꽃을 보며 나는 들꽃이다, 장미는 장미대로 이 들꽃은 이 들꽃대로 모두 있는 그대로 완벽하게 아름답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2020. 6. 25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고 있었다.
우산을 쓸 정도는 아니어서 펼쳤던 우산을 다시 접었다.
속눈썹으로 빗방울 하나가 떨어지며 매달렸다.
빗방울이 동그랗게 고여 반짝이는 풀잎 위에 나비 한 마리가 앉아 있다가, 클로버 꽃 위에 앉아있는 다른 나비에게 날아가 날개를 펼쳤다 접었다 하며 푸른 빛으로 유혹을 하고 있었다.
조그만 벌 하나가 이를 시샘하는지 방해를 하자, 나비는 잠시 날아오르는 듯싶다가 다시 클로버꽃에 앉았다.
둘은 뒤돌아 조금씩 꼬리를 가까이 가져다 대었다.
사랑을 나누기 전, 설렘의 시간이었다.
왠지 부끄러워져서 살며시 일어나 자리를 비켜주었다.
비에 젖은 비릿한 흙냄새가 났다.
2020. 6. 20
노란 꾀꼬리 한 마리가 파란 하늘을 가르며 날아갔다.
할머니 산소에 다녀올 때면 꼭 자연의 어떤 것을 만나게 된다는 지인의 말이 생각났다.
엄마 산소에 다녀오는 길에 만난 노란 꾀꼬리.
예쁜 새의 모습으로 엄마가 인사를 건네준 것 같았다.
어쩌면 히요- 히요- 하고 나를 불렀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파란 도화지에 노란 점 하나, 기억하고 싶은 것은 그것뿐이었다.
2020. 6. 12
하얀 리본을 만들며 짝짓기 중인 나비 두 마리.
"지금이 곤충들의 구애의 계절이야."라고 언젠가 그가 말했다.
아마도 이맘때 즈음이었겠지.
이토록 곤충들이 사랑에 빠진 걸 보면.
2020. 6. 11
이미 꽃잎이 떨어지기도 전에 뜨거운 6월의 햇빛에 바짝 말라버려 흉측하게 변해버렸지만, 분명 얼마 전까지 아름다운 모습을 뽐내며 진한 향기를 풍기고 있었을 것이다. 조금 더 일찍 왔으면 좋았을 걸,하고 생각했지만 뒤늦게 피어나 아직 생생하게 피어져 있는 장미도 많이 남아있어서 이제라도 온 것이 다행이다,라고 생각을 바꾸었다. 장미에 코를 가까이 가져다 대고 향기를 들이마셨다. 몸속 가득히 향기가 퍼지며 요 며칠 가라앉았던 기분이 조금씩 떠오르고 있었다.
두 연인이 데이트 중이었다. 짧은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자가 장미 가까이 얼굴을 가져다 대고 포즈를 취하더니 "예쁘게 나왔어?"라며 남자 손에 쥐어진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투덜거리며 다시 포즈를 취했다.
양산을 쓰고 산책 중이던 아줌마 두 명이서 "벌써 시들었네"라고 말하고는 장미꽃에 둘러싸여 있는 비너스 동상 앞에서 사진을 찍더니 몇 번이나 벌써 시들었다고 말하며 아쉬워했다. 그 아줌마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불쑥 엄마 생각이 났다. 꽃을 참 좋아하던 엄마. 시골집 마당에는 늘 한가득 꽃이 피어나 있었다. 엄마가 이곳에 왔다면 분명 좋아하셨을텐데. 기분이 다시 가라앉기 시작했다. 서둘러 장미원에서 나와 넓은 호수를 바라보러 갔다.
호수는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그 주위로 사람들이 여름을 즐기고 있었다. 걷거나 달리는 사람들,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 개를 산책시키는 사람들, 돗자리를 펴고 낮잠을 자는 사람들도 있었다. 다리 아래 그늘에는 노인들이 테이블에 둘러앉아 라디오를 듣거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공원에 있는 사람들을 보며 한가롭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공원에 있으면서 내 마음은 이리저리 출렁거리느라 어리럽기만 했다.
오래되어 높게 자란 나무들이 울창한 숲 한쪽에 양귀비가 가득한 들판이 펼쳐져 있었다. <꽃씨 파종 지역입니다.>라고 씌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일부러 씨를 뿌려 만든 곳인 것 같았다. 동네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양귀비. 그래서 산책길에 우연히 피어난 한 송이라도 발견하면 놀랍고 반가운 마음으로 쪼그리고 앉아 한참을 들여다봤던 양귀비가 색색깔을 달리하며 엄청나게 피어져 있어 어떤 꽃을 바라봐야 할지 몰랐다.
호수 구석진 곳에는 언제부터 이곳에 살고 있었는지 모를 정도로 커다란 회색 잉어들이 무리 지어 꿈틀거리며 헤엄치고 있었다. 다리에 매달려 아래를 내려다보자 먹이를 주려고 온 건 줄 알았는지 내 주위로 몰려들어 얼굴을 내밀며 뻐끔거렸다. 그 사이로 예쁜 빨간 무늬 잉어가 새초롬히 헤엄을 치고 있었다. 사내들 사이에 홍일점 같은 모습으로.
커다란 버드나무에서 늘어진 잎이 호수에 잠겨 있고 그 주위로 연잎이 둥둥 떠있었다. 바람에 흔들거리는 수초 위로 파란 잠자리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두 연인이 돗자리를 펴고 누워 무언가를 속삭이며 깔깔거리고 있었다. 한 폭의 풍경화 같은 모습이었다.
햇빛이 뜨거워 목 뒤가 빨갛게 익고 있었다. 가방에 넣어놨던 물도 다 마셔서 갈증이 났다. 아직 호수 공원을 다 돌아보지도 못했는데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여름은 여름이었다.
2020. 6. 9
공원에서 이어진 자그만 숲은 오랜 시간 동안 이곳의 사람들과 평화롭게 지내온 흔적이 느껴졌다. 낯선 이가 불쑥 들어오자 까마귀는 까악까악 하고 계속해서 나를 따라다니며 숲의 새들에게 나의 존재를 알리다가 이내 시시해졌는지 언젠가부터 보이지 않았다.
부스럭 소리가 나는 곳을 쳐다보니 청설모 한 마리가 재빠르게 나무 위로 올라가 나를 감시하고 있었다.
영롱한 빨간빛의 뱀딸기가 곳곳에 자라있었다. 따먹으려 한 건 아니었는데 가까이 다가가니 모기들이 낯선 이로부터 숲의 열매를 지키려는 듯 연신 달려들었다.
위를 올려다보면 빼곡한 잎들 틈으로 간신히 보이는 햇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나무들이 잎사귀로 숲의 지붕을 만들기라도 한 것 같았다. 덕분에 공원을 걷는 동안 무더운 여름의 햇빛에 지친 몸이 시원해지고 있었다.
작은 숲에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정자가 세워져 있었고, 아줌마 두 분이 앉아서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숲이 끝나는 곳에서 할아버지 한 분이 같은 자리를 빙글빙글 돌며 걷고 있었다. 마치 이곳에 계속 존재했던 사람들처럼, 자연스럽게 숲과 섞여 있었다.
방문객인 나는 잠시동안 시원한 지붕 아래에서 쉴 수 있도록 허락해준 숲에게 인사를 하고 다시 공원으로 향했다.
꽃으로 가득한 정원. 꿀벌들이 만취라도 한 듯 정신없이 펜스데몬의 하얀 꽃망울 속으로 들어갔다 나왔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이에 질세라 커다란 호박벌이 꿀벌들을 밀쳐내며 베로니카 사이에서 무거운 몸으로 요란스럽게 웅웅거리며 날아다녔다. 금계국, 천인국, 꽃창포.. 이름만큼이나 화려한 꽃들이 막 피어나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가운데 아직 잠들어 있는 봉오리들 틈에서 단 한 송이의 분홍색 백합이 활짝 웃고 있었다.
까악- 하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려 하늘을 올려다보니 아까 나를 따라오던 까마귀가 어디론가 재밌는 구경거리를 찾아 날아가고 있었다.
2020. 6. 6
아직 잡초 정리를 하지 않았는지 잔디밭에는 온갖 풀들이 뒤섞여 자라있었다. 유난히 클로버가 많이 자라있어 네잎클로버를 찾으며 걸었다. 걸음을 멈추고 싶지는 않았다. 불쑥 찾아오는 그런 행운처럼, 노력하지 않아도 네잎클로버가 눈에 띄어 찾기를 원했다. 그러나 해가 지기 시작하고 있는데도 찾을 수가 없자 조금씩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마음을 바꿔 클로버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자세히 들여다보길 여러 번, 무성한 세잎클로버 사이에 네잎클로버 하나가 반갑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네잎클로버를 찾아도 뽑지 않기로 한 터라, 잎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고 소원을 빌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을 때 그 옆에 네잎클로버 하나가 더 있는 것을 보았다. 한 번에 두 번의 행운을 찾게 되다니! 조금 전의 오만했던 스스로를 반성하는 나를 격려해 주면서, 원하는 것을 위해서는 조금의 노력이라도 해야 한다고 알려주는 작은 선물인 것 같았다.
그새 해가 완전히 사라져 깜깜해지더니 가로등이 켜졌다. 사방에서 개구리가 울기 시작했다. 가까이에서 꽉꽉- 하고 우는소리가 들려 연못을 들여다보니 청개구리 한 마리가 인기척을 느끼고 몸을 숨기려고 가로등 빛을 피해 폴짝폴짝 뛰어가고 있었다.
남자아이들이 사거리의 커다란 다리 가운데 있는 물웅덩이를 들여다보며 소란을 피우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한 아이가 돌멩이를 들고 길을 잃고 구석에서 안절부절 하고 있는 개구리 한 마리를 맞추려 하고 있었다. "개구리 아프니까 괴롭히면 안 돼. 그냥 보기만 해야지."라고 하자 아이들은 우물쭈물하더니 자전거를 타고 가버렸다. "어쩌다 여기까지 와버린 거니." 연못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와버린 개구리가 불쌍했다. 유난히 개구리를 잡아서 놀기 좋아하던 어린 시절의 나였다. 학교에서 개구리를 잡아오라는 숙제를 내줘서 집 근처 논두렁에 가서 커다란 개구리를 잔뜩 잡아갔었다. 개구리를 꺼내어 손에 쥐고서 자랑스러워하던 나를 반 아이들은 영웅이라도 되는 듯이 바라보았다. 방학이 되어 시골에 가면 개구리 뒷다리에 실을 묶고서 가지고 다녔다. 그러다 지루해지면 그대로 풀숲에 던져버리고는 했었다. 그때 내가 잡았던 개구리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지금 이 도시에 살고 있는 개구리들이, 저녁이 되면 아파트 단지를 경쾌한 합창으로 가득 채우는 이 개구리들이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조금 전의 개구리가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기를 바래주고 싶었다.
2020. 6. 3
어딘가 가고 싶은 기분이 들어 무작정 집에서 나왔다. 어디를 갈까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익숙한 단골 카페에 갔다. 좋아하는 자리인 창가의 테이블에 앉아 맞은편 건물의 담장에 만발한 붉은 장미꽃을 바라보며 커피 한 모금과 달콤한 마들렌 한 조각을 베어 먹었다. 기분이 조금은 나아지는 듯 했지만 어제 있었던 사소한 일로 인해 여전히 마음이 흔들거렸다. 그녀가 그에게 전화를 했다는 것 만으로도 나의 마음은 왜 흔들린걸까. 이 흔들림은 나의 것이 아니라 수시로 왔다가 가버리는 허상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그래도 나는 조금 쓸쓸해졌다. 때때로 쓸쓸해지고 그래서 사랑하고 싶어지는 여자의 마음. 장미꽃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흔들릴 수록 향기는 더 진하게 퍼져가겠지. 여자의 마음은 그런 것이다. 흔들릴수록 더 진한 향기가 나는 것이다.
아직 개화 시기가 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집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하천으로 연꽃을 보러갔다. 유난히 사람이 보이지 않아 마치 낯선 세계에 혼자 들어온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덤불 속에 숨어 좀처럼 모습을 보이지 않는 작은 새의 울음소리만 요란했다. 첨벙이는 소리가 유독 커다랗게 들려 깜짝 놀라 쳐다보면 커다란 물고기가 어두운 물속으로 아주 느리게 희미해지며 모습을 감추었다. 버드나무 가지가 마치 물을 마시고 있는 것처럼 물에 닿아 흔들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셀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연잎으로 가득한 하천을 따라 걸었다. 드문드문 작은 하얀 연꽃이 피어 있었다. 곧 여름이 오면 이곳은 연꽃으로 가득해질 것이다.
나비 한 마리가 날아왔다. 마치 내게 인사하러 온 것처럼 곁에 있는 꽃 위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도 날아가지 않았다. "너 참 예쁘다."라고 말해주자 기분이 좋아진 것처럼 가만히 날개를 팔랑였다. 다시 돌아가는 길에 내 발걸음 소리에 놀랐는지 수초 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가마우지 한 마리가 요란하게 푸드덕거리며 날아갔다.
2020. 6.1
바람이 많이 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나뭇잎과 풀들이 소란스럽게 웅성거렸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집으로 돌아갈까 잠시 망설였지만 탁 트인 풍경 속에 만발한 노랗고 하얗고 빨간 꽃들이 바람에 춤을 추며 내가 떠나지 못하도록 유혹하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들여다보면 벌과 나비가 그 유혹에 참지 못하고 이리저리 매달리며 방황하고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물결 위에서 햇빛이 반짝이며 차르르 퍼졌다 사라졌다를 반복했다. 물 위에 햇빛이 반짝이는 것을 보는 것을 좋아한다. 그것을 보고 있으면 탄생과 소멸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맴돈다. 소멸은 슬픈 것이지만 짧은 순간에 무수히 반복되는 그 소멸은 너무나 아름답게 보인다.
아무도 없는 길을 걸었다. 주위에는 온통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와 꽃과 풀. 불현듯 나는 삶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사랑해!"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 아무도 듣는 사람이 없으므로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라고 마음껏 외쳤다. 갑자기 이제는 하늘에 있는 그리운 이들이 생각나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내 마음속에는 아직도 커다란 슬픔이 남아있다가 예상하지 못했던 순간에 불쑥 튀어나온다. 이토록 찬란한 순간에.
2020. 5.31
꽃은 계절을 달리하며 피어난다. 산책을 하다 보면 어느 계절에는 어떤 꽃이 피는지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오랜만에 찾은 산책길에는 얼마 전까지 드문드문 피어있던 금계국이 만발하여 개울가를 노랗게 가득 덮고 있었다. 이제 막 꽃봉오리가 터지기 시작한, 이름과는 어울리지 않게 향기롭고 예쁜 쥐똥나무 꽃에는 그 짙은 향기에 취한 꿀벌들이 어지럽게 날아다니고 있었다. 산책길 한쪽으로는 노랗게, 다른 한쪽으로는 하얗게, 경쟁이라도 하듯이 꽃들이 피어나고 있었다. 그 틈으로 빼꼼히 얼굴을 내민 연보랏빛 메꽃. 가까이 다가가 들여다보니 옹기종기 모여 방긋 웃고 있었다. 소란스럽게 뽐내는 꽃들 멀찍이에서 단 한 송이의 붉은 양귀비가 말없이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꽃들의 화려한 잔치가 벌어지는 동안 검은 얼룩무늬 고양이가 무심히 귀를 긁고 있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가만히 멈춰 서서 한참을 바라 보더니 다시 느릿느릿 어디론가 향했다.
2020. 5. 27
아직 연꽃은 피지 않았다. 5월에는 연꽃이 피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내심 서둘러 피어난 하나의 연꽃이라도 있으면 좋겠다고 기대를 했다. 넓은 연못 가득히 연잎이 둥둥 떠있었다. 연잎 위에는 군데군데 동그랗게 물이 고여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연못 주위를 감싸고 있는 수초와 그 사이에서 노란 얼굴을 내밀고 있는 붓꽃. 사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웠다. 탁한 물속에서 통통하게 살이 오른 올챙이들이 놀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면 깜짝 놀라 흩어졌다가 금세 다시 모여서 꼬리를 흔들었다. 연못 위에는 하늘과 햇빛과 나무 그림자가 한 폭의 풍경화를 그리고 있다가, 물고기가 뛰어오르며 만든 파동으로 흔들리며 추상화가 되었다. 이 순간을 그림으로 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름다운 것을 보면 아름다운 것을 그리고 싶어진다.
2020. 5. 23
클로버 숲 사이에 조그만 아기 고양이가 있었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보이는 아기 고양이는 아직 겁을 모르는지 가까이에서 빤히 쳐다보다가 서툰 발걸음으로 수풀 속으로 들어갔다. 푸른 빛을 내는 작은 나비가 날아왔다. 나비는 클로버 꽃 위에 앉아 잠시 그 신비로운 자태를 바라볼 수 있도록 허락해 주고서 다시 반짝이는 날갯짓을 하며 날아갔다. 햇살이 머리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후덥지근한 바람이 여름으로부터 불어왔다.
2020. 5. 5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도화지 같은 하늘에 삐이이이- 하고 매가 울더니 검은 점을 그리며 날아갔다.
검은 점이 희미해지다 사라진 그 도화지를 바라보며 문득 사람과 사람이 좋아하는 그 마음의 사이, 그 공간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2020. 5. 2
개울에 은빛 물고기가 튀어 오르며 동그란 원을 그린다.
나는 온통 당신 생각뿐이다.
2020. 4. 28
송사리들이 떼를 지어 헤엄치다 부딪히며 흩어진다.
바람이 불자 하얀 꽃잎들이 땅에 떨어져 구른다.
벌레가 날아와 옷에 앉았다가 날아갔다.
2020. 4. 27
아파트 단지 옆 공터를 지나가는 길이었다. 이쪽에서 꿩꿩- 하니 저쪽에서 꿩꿩- 하고 꿩 울음소리가 들렸다. 족히 3~4 마리는 있는 듯했다. 가까이 소리가 나는 쪽을 들여다보니 마른 풀숲 사이로 알록달록한 꿩 한 마리가 불쑥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공원에 도착해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개울가에는 수초가 제법 길게 자라 있었다. 백로 한 마리가 흐르는 물 한 가운데 서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반짝이며 백로가 서 있는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마치 빛나는 조명 한 가운데 서 있는 배우처럼 백로는 아름다운 모습을 뽐내다가 느릿느릿 뒤돌아 걸어갔다.
오랜만에 간 호수 공원에는 여기저기 꽃을 심는 사람들로 분주했다. 그 주위를 서성이며 어떤 꽃을 심고 있는지 구경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화려한 모양의 꽃들이 줄을 맞추어 가득 심어지고 있었다. 어쩐지 들판에 아무렇게나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들꽃들이 더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수 근처로 다가가니 한 여자아이가 긴 막대기를 주워 물을 휘휘 젓고 있었다. 수초 근처에서 소금쟁이들이 물결을 타고 신나게 헤엄을 치고 있었다. 야구복을 입은 두 소년이 지나갔다. 사방에서 수많은 참새들이 짹짹이며 날아가 어지러웠다.
문득 어렸을 때 느꼈던 어떤 기분이 스쳐 지나갔는데 그게 어떤 것인지 도무지 기억나지 않았다.
2020. 4. 26
몸살이 나은 뒤 첫 산책이다.
그새 풍경이 제법 녹색이 되었다.
오늘은 하늘도 맑고 파랗고, 사람들의 옷차림도 가볍다.
빨간 꽃이 탐스럽게 피어난 명자나무 아래 분홍색 자전거가 쓰러져 있었다.
어느샌가 라일락이 피었다가 지고 있었다.
2020. 4. 6
그림책을 넘기며 아이에게 꽃과 나비를 설명해 주고 있는 일본인 엄마,
호미로 땅을 파며 꽃을 심고 있는 아주머니,
나무 앞에 서서 가만히 나무껍질을 벗기고 있는 할아버지,
커다란 비눗방울 하나가 날아가더니 공중에서 퐁 하고 사라졌다.
파란 모형 비행기를 날리는 아이들,
캐치볼을 하는 아이들,
줄넘기를 하는 여자아이,
파란 비행기가 잠시 하늘을 나는가 싶더니 그대로 고꾸라졌다.
마른 풀포기를 들고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걸어가는 통통한 소년,
강은 어디론가 흐르는데 여기는 고여있어서 호수라고 알려주던 아빠와 아들이
그네에 앉아 호수를 바라보고 있다.
노란 우산을 펼치고 잔디밭에 누워있는 연인들,
아직 마른 잔디밭 곳곳에 노란 민들레가 불쑥하고 얼굴을 내밀었다.
2020. 3. 29
계단에 앉아 호수를 바라보고 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물결에 반짝이는 햇빛이 아름다워,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
계속해서 보고 있을 수 있을 것 같아.
옆에서 물속을 들여다보던 아이들이 "물고기다!"라고 외쳤다.
저번에 왔을 때만 해도 보이지 않던 송사리들이 이제 깨어났나 보구나.
반짝이는 물결이 저 멀리에서부터 차르르 나에게 다가왔다.
아름답다.
배가 고파졌다.
집으로 돌아가야지.
2020. 3. 24
송사리들은 아직 알에서 깨어나지 않았는지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젊은 엄마가 아이 둘을 데리고 곁에 않더니 함께 사진을 찍었다.
아이들은 뭐가 그리도 신났는지 발을 동동 굴렀다.
평화로웠다. 이대로 드러누워 낮잠을 자고 싶었다. 누군가와 함께라면 더 좋을 것 같았다.
아이들의 엄마가 "이제 산책해 볼까."라고 말했다.
2020. 3. 18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이따금씩 하얀 비행기가 날아갔다.
봄의 새싹을 기다리고 있는 메마른 나무들 사이에서
여전히 마른 나뭇잎들을 매단 채 겨울을 꽉 움켜쥐고 있는 몇 그루의 나무가 안쓰러웠다.
담담하게 소멸을 맞이하는 떨어진 나뭇잎들이
흙으로 돌아가기 위해 바람을 타고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2019. 11. 22
물가의 계단에 앉아서 호수 위에 반짝이는 햇빛을 바라보았다.
빛이 물결을 타고 흐르다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수천수만 개의 빛이 생겨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그곳에는 생과 사가 뒤섞여 아름다운 광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자전거를 탄 아이들이 소리를 지르며 지나갔다.
한 아저씨가 삐걱삐걱 소리를 내며 운동기구를 타고 있었다.
유모차를 밀며 젊은 아이 엄마가 통화를 하고 있었다.
호수 주위로 띄엄띄엄 사람들이 둘러앉아 각자의 시간을 보내며 한가로이 오후를 즐기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죽는 이곳에서 저 빛처럼 아름답게 빛나고 싶다.
누군가의 마음에 여운을 남기고 싶다,고 생각했다.
배낭 앞주머니에서 요구르트를 꺼내어 마시고는 바지를 툭툭 털고 일어났다.
2019. 10. 3
구름 사이로 햇빛이 다시 나오기를 기다리며 물가에 앉아있었다.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이 일렁이는 물결에 비추어 흔들리고 있었다.
한 아이가 옆에서 "바다다!"라고 말했다.
2019. 9. 9
지난밤, 창밖에서 불어오는 링링의 휘파람 소리를 들었다.
나와서 같이 놀자는 듯 짓궂게 창문을 두들겨대다가 곧 다른 곳으로 친구를 찾으러 갔는지 잠잠해졌다.
잠을 자고 일어나 마당에 나가보니 커다란 나무 세 그루가 꺾여있었다.
사방에 부러진 나뭇가지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꽤 심술궂은 아이였구나, 링링.'
점심을 먹고 근처 공원을 가로질러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태풍 링링의 피해지역입니다' 라는 표지판이 군데군데 붙어있었다.
'이곳에도 다녀갔구나, 링링.'
개울가에서 첨벙거리며 놀다 갔는지 뿌옇게 변해버린 흙탕물 속에서,
파랗고 작은 꽃들이 링링의 장난에도 꺾이지 않고 살포시 예쁘게 피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