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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3. 9

아파트 마당에 매화가 피었다.
지난봄에도 그 자리에 피어있던 매화가.
분리수거 가방을 양 팔에 들고 가만히 서서 매화를 올려다보았다.
넌 참 예뻐서 이렇게 나를 설레게 하는구나.
비닐장갑을 끼고 있어서 쓰다듬어 주지는 못했지만
나를 보며 방긋 웃어주는 예쁜 하얀 얼굴을 보며
잠시나마 내 마음에도 봄이 들어왔다가,
잊고 있었던 양 팔에 가득한 생활의 무게를 알아채고는
다시 고개를 돌리고 걸음을 옮겼다.

2023. 2. 23

작년 생일, 마흔이 되었다며 좋아했는데 이번 생일, 나는 다시 마흔이 되었다.
법이 바뀌어서 그렇다고 하지만 실제로도 이 세상에 태어나 딱 40년을 채워서 살았으니
지금이 마흔이 맞기는 맞는 것 같다.
내심 빨리 30대가 지나가길 바랐던 터라, 다시 30대가 되어야 한다고 했을 때
나는 40살이라고 우기며 고집을 부렸다.
하지만 생일이 되기 전 지난 몇 달간을 떠올려보면 이제야 지난 삶을 보내주고 
진정한 마흔으로서 새로운 삶에 들어서게 된 것 같다.

 

먼저, 20대부터 써오던 수십 권의 일기를 모두 읽고, 모두 버렸다.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나의 지난날들의 기록이 모두 사라졌다.
이곳을 비롯하여, 휴대폰의 메모장, 그리고 어딘가에 조금씩은 남아있겠지만
나의 지난날의 생각과 감정들은 이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작년 11월 1일부터 시작한 108배 108일 참회기도 정진.
생일 바로 전 날까지 무사히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할 수 있어서
끝까지 해 낼 수 있도록 잘 버텨준 몸이(특히 무릎) 대견하고 감사하다. 
나의 지난날들을 참회하며, 나 자신에게, 그리고 나와 함께 한 인연들에게 직접 미안함과 고마움을 전했다.
지금은 만나지 못하는 오래전 인연들과, 하늘에 계신 부모님과 스티치에게도 마음이 전해지길 바라며 기도했다.
기도가 막바지가 되었을 즈음 며칠간은 반성과 후회로 기도를 하는 내내 울기도 했다. 
감정적으로 참 힘든 날들이었지만 눈물을 다 쏟아내고 나니 

마음속에 남아 있던 불필요한 감정들이 모두 닦인 것 같아 한편으로는 개운했다.

 

또 새해 시작함과 동시에 나와 정헌이 연달아 코로나에 걸려서 나름대로 액땜도 했다.
지금은 둘 다 잘 회복되고 있고, 덕분에 오히려 좋아진 몇몇 상황들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며
앞으로는 좋은 일들만 가득하리라 기대해 본다.

 

그 밖에도 크고 작은 여러 일들이 있었지만 

무사히 30대의 마지막을 잘 보내주었다.

마흔. 
이제는 뽑을 수 없을 만큼 많아져 버린 흰머리도,

웃으면 눈가에 가득한 주름도,

거칠어지는 손과 발도

그대로 좋다고 생각되고,
무례한 사람을 상대할 때도,

끊이지 않는 집안일도,

​내게 주어진 의무도
예전만큼 싫지 않다.

무엇보다 나와 정헌과 자네트가 함께 하는 이 삶이 너무나 소중하고 감사하다.
나는 지금의 내가, 내 삶이 좋고, 40대의 모든 날들이 너무나 기다려진다.

2022. 8. 17

개울을 따라 흐르는 반짝이는 빛.
길게 자라 쓰러진 수초가 흐르는 빛을 쓰다듬는다.
지난여름에도, 지지난 여름에도 보았던 이 풍경을
이번 여름에도 같은 자리에 서서 다시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이다음의 여름에도, 그다음의 여름에도
여기에 서서 이 풍경을 바라볼 것이다.
이 감정은, 떨리는 이 감정은
나는 사랑에 빠졌다는 것.
내게 남아있는 수많은 여름과 
나는 벌써부터 사랑에 빠진 걸 알았다. 

2022. 7. 27

이상한 꿈을 꿨다.
이상한 꿈을 꾸고 나면 잠에서 깨자마자 침대에 누운 채로 메모장에 기록을 해 놓는데
오늘은 이상한 꿈이네,라고 생각하며 멀뚱히 침대에 누워있었다.
기록되지 않은 꿈은 금세 사라져 버렸지만 마지막 장면만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엄마는 나와 그에게 이제 홍수기가 오고 그다음은 빙하기가 올 거라며
빨리 우주선을 타고 떠나야 한다고 했는데
우리는 자네트와 함께 이곳에 남을 거라고 했다.
(동물은 우주선에 타지 못하는 설정이었나 보다.)
나는 두려우면서도 우리가 끝까지 함께 있을 거라는 기쁨으로
우리의 각오를 뿌듯해하며 온몸에 흐르는 전율을 느끼다 잠에서 깨어난 것이다.

2022. 7. 22

어지러운 마음, 시끄러운 마음, 어리석은 마음..
마음은 갖가지 모습으로 나를 괴롭히지만
아주 천천히 닦아내다 보면
아름다운 무언가가 그곳에 있을 것이다.

이번 작업은 나를 설레게도, 초조하게도 한다.
빨리 보여주고 싶은 이 마음도,
어느샌가 닦여 있을 것이다.

2022. 6. 2

6월, 이제 막 여름이 시작되었는데 햇빛은 벌써 한여름처럼 뜨겁다.
얼마 전까지 군데군데 자리를 잡고 앉아있던 사람들도

이제는 해가 지고 나서야 나오려는지 공원도 부쩍 한산해졌다.
덕분에 이 여름 오후를 홀로 누리고 있다.
공원 구석진 곳에는 원 모양의 바닥에 테이블 세 개가 놓여있는데
그늘이 없어서인지 평소에도 거의 아무도 오지 않는,
이곳이 바로 나의 아지트다.

 

이 조그만 원 안에서 자유를 느낀다.
우두커니 앉아 
눈으로는 풍경을 보고
귀로는 소리를 듣고
코로는 향기를 맡고
피부로는 바람을 느낀다.
보고 듣고 숨 쉬고 느끼며 나는 살아있고 존재한다. 바로 그것뿐.
어떤 괴로움도, 슬픔도, 두려움도, 불안도 이 안에 들어올 수 없다.

 

근처에서 새 한 마리가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지른다.
귀에 거슬리지만 익숙하다. 직박구리구나, 생각하자마자
직박구리 한 마리가 원 안으로 들어와 나를 쳐다보고는 
다시 나뭇잎이 무성한 나무로 날아가 몸을 숨긴다.
이곳에는 다시 나뿐이다.

2022. 5. 2

인생이 꿈이라면 행복한 꿈을 꾸고 싶다.

2022. 4. 25

그대라는 이름 대신에 
꽃을 사랑하고

당신이라는 이름 대신에
바람을
구름을 
꿈을 사랑하네

2022. 3. 29

편한 복장에 배낭을 메고 운동화를 신고 집을 나선다.
밖으로 나가는 순간 따뜻한 햇볕이 얼굴을 비출 때 절로 아! 하고 탄성을 지르며 행복을 느낀다.
곧이어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아직은 좀 춥네,라며 외투의 지퍼를 끝까지 올리게 하지만
이제는 봄이 거의 자리를 다 차지하고서 마지막까지 버티고 있는 겨울이 남은 곳도 마저 점령 중이다.
산수유가 피어나고 개나리가 피어나더니 갑자기 매화도 피어났다.
부지런한 한 그루의 매화나무는 벌써 만개하여

(아름다운 비유를 하지 못하는 것이 아쉽지만) 보자마자 팝콘 같네,라고 생각하였다.
목련도 봉오리가 제법 커진 걸 보니 곧 피어나 화려하게 뽐을 낼 것 같다.
긴 겨울잠을 자고 일어난 것처럼 봄이 시작되기가 무섭게

그동안 못한 산책을 하러 하루가 멀다 하고 집을 나선다.
아직은 찬 바람이 제법 불어서 집에 들어올 때 즘이면 머리가 지끈거리고 좀 피곤해지지만
그래도 자꾸만 밖에 나가고 싶어지는 걸 보면 봄이 좋기는 좋은가 보다.

 

2022. 3. 5

어디선가 많이 본 얼굴, 반갑고 그리운 느낌. 누구일까 생각하다가 엄마라는 걸 알았다.
나는 엄마에게 다가가 엄마를 끌어안고 엄마- 엄마- 하며 울다가 잠에서 깼다.

꿈에서 엄마가 웃고 이야기하는 걸 보고 쓰러졌던 엄마가 긴 잠에서 깨어났다는 걸 알고서 얼마나 기뻐하며 울었던지.
하지만 잠에서 깬 나는 조금 시간이 지난 뒤에야 이것이 꿈이었고 엄마는 돌아가셨다는 걸 기억해 내고
꿈에서 그토록 기뻐하던 마음이 서러워 울다가 어느새 다시 잠이 들고 만 것이다.

2022. 3. 2

산책을 하면서 꽃이 피었는지 궁금해 공원의 나무들을 살폈다.
지난 기록을 보니 작년에는 2월 말쯤 산수유가 피어났나 보던데,
가까스로 봉오리 틈으로 얼굴을 내밀려 하는 단 하나의 노란 꽃 한 송이만 만날 수 있었다.
그래도 이렇게 애써서 피어나려 하는 봄이 반가워 손가락으로 어루만지며 인사해 주었다.

 

겨우내 봄 봄 봄, 하며 봄을 기다려왔건만 막상 3월이 되니 별다를 것 없이 시간이 흐른다.
겨우내 나는 40대가 되었고, 살이 조금 쪘고, 와인을 자주 마셨고, 느릿느릿 작업을 했다.

 

지난 40살 생일이 되기 전까지 나는 살아있기를 간절히 바라며 
어리석은 두려움과 불안을 감추며 얼른 2월이 지나가기를 바랬다.
그리고 싶은 그림들과 책으로 만들어내고픈 이야기들을 모두 다 그리고 다 쓰려면 살아있어야 할 텐데, 
책꽂이 가득 꽂혀 있는 읽지 않은 책들을 모두 다 읽으려면 살아있어야 할 텐데,
가보고 싶은 곳, 먹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모두 다 가보고, 먹고, 하려면 살아있어야 할 텐데, 라며.
40살이 지나면 비로소 안도하며 마음껏 생을 살아갈 수 있을 터였다.

 

그래서인지 3월이 되자 그동안 나를 짓누르던 초조함이 사라지고
시간은 내게 충분하다며 마음껏 여유를 부리고 있다.
그저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고 뭐든지 다 할 수 있을 것 같다.
 

2021. 11. 8

 

겨울이 온다.
나의 겨울은, 나를 방으로 안내하여
지난 봄과 여름과 가을의 기억들을 꺼내어 놓고
때로는 봄, 때로는 여름, 때로는 가을 속에서 살아가게 할 것이다.

 

바람이 나뭇가지들을 흔들며 겨울을 재촉한다.
노랗게 물든 나뭇잎들이 떨어진 자리에
곧 하얀 눈이 쌓일 것이다.

 

2021. 8. 18

하얀 구름이 연기처럼 피어오르고
작아지는 비행기가 구름 속으로 사라지고
나비 한 마리가 비틀비틀 날아가고
개 두 마리를 산책시키는 아주머니가 지나가자,
교차로의 한 가운데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던
여름이 손을 흔들고는 뒤돌아 길을 건넌다.

2021. 7. 13

 

기록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찾지 못한 기억들은 어딘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3번의 여름,
시를 쓰기 위해 사랑하고 싶었던 날들은 이제 모두 지나갔다.

2021. 5. 26

창문으로 들어오는 시원한 공기에 이끌려 겉옷을 걸치고 잠시 밖에 나갔다.
집 앞 도로에 있는 다리 한 가운데에 서서 가만히 일몰을 지켜보고 있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비가 그친 후 하늘을 덮고 있던 구름들이 동글동글하게 모여 그 뒤로 맑은 하늘을 보여주고 있었다.

 

해가 완전히 지기 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아있을 것 같아 공원을 걸었다.
얼마 전까지 꽃으로 가득했던 나무들은 이제 대부분 녹색 잎으로 덮여 있었다.
낮에도 보았던 풍경이지만 해가 질 무렵에 보니 같은 풍경도 다르게 보였다.
개울가 옆에 피어있는 노란 붓꽃은 곧 피어날 다른 꽃을 위해 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붓꽃이 진 다음에는 수국이 피었던 것 같다. 
지난여름 수국이 피었던 자리에는 작은 아기 개구리들이 모여 있었지.

 

다시 하늘을 보니 해가 마지막 인사를 하고 있었다.
비행기 하나가 지나가고 곧이어 다른 비행기가 지나갔다.
일기예보에서는 오늘 밤 다시 비가 내린다고 했다.

2021. 5. 6

어딘가 조금은 부족한 듯한 우리 셋이 모여서 이대로 완벽한 삶을 살아간다.

우리 셋이 함께이기에 가능한 지금의 행복.

나와 손을 잡고 걷는 것이 익숙해 혼자 걷는 것이 어색한 그를 볼 때,
넓은 자리를 놔두고도 나와 소파 사이의 좁은 곳에서 불편하게 잠든 자네트의 체온이 느껴질 때,
어딘가 이상한 그 때에 나는 행복하다고 느낀다.

2021. 3. 10

쓸쓸하지도 외롭지도 않고
설레지도 들뜨지도 않고
봄이 오면 묵묵히 피어나는 꽃처럼
가만히 이 자리에서
다만 살아가고 있다.

2021. 1. 21

우리의 작은 세계가

이렇게 거대하게 빛나고 있어.

2021. 1. 6

햇빛이 드는 자리에  ㄷ자로 누워 잠든 자네트의 모습이 평화롭다.
이 사랑스러운 존재가 나로 인해 행복하기를 바란다.
너로 인해 내가 행복하듯이.

2021. 1. 3

지난 일기들을 읽고 있다.
가만히 잠자고 있던, 나도 잊고 있었던 나의 문장들.
그것들을 읽는 순간, 그날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살아난다.
다시 일기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사라지는 나의 날들이 언제라도 다시 살아날 수 있도록.

2020. 10. 20

자칼과 개코원숭이는 어린 표범을 쫓아내려고 떼 지어 몰려들어 괴롭힌다.
참다못한 어린 표범은 자칼을 쫓기 시작하고 한 마리를 물어 나무 위로 옮겨 그들에게 보여준다.
본 때를 보여주기에는 단 한 마리면 된다.

2020. 8. 14

남자는 여자의 향기를 맡았다.
여자는 꽃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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